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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감성 스릴러에 성장 이야기, 블랙북

by 일상 좋아 2025.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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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연 작가의 장편소설 『블랙북』은 복수와 정의, 기억과 망각이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감성 스릴러 성장소설입니다. 기억을 되찾기 위해 금지된 책, ‘블랙북’을 읽게 된 주인공의 서사는 단순한 미스터리를 넘어서 인간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와 싸우는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감정을 휘감는 서정성과 빠른 전개가 공존하는 이 작품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청소년과 청년 모두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금지된 기억을 꺼내는 책, 블랙북의 시작

『블랙북』의 시작은 하나의 의문에서 출발합니다.

 

“잊고 싶은 기억과 마주할 용기가 있는가?”

 

주인공 '윤이랑'은 어느 날 학교 도서관에서 존재하지 않아야 할 책 한 권을 발견합니다. 블랙북. 이 책은 일반적인 책이 아닙니다. 접하는 순간, 묻혀 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고, 그 기억들은 이랑의 삶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진실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블랙북은 단순한 판타지 소품이 아닙니다. 작가는 이 책을 매개체로 삼아, 우리가 일상 속에서 외면하거나 망각 속에 감춰버린 진실들을 하나씩 끄집어냅니다. 기억은 때로 사람을 살리고, 또 어떤 기억은 한 사람을 무너뜨립니다. 『블랙북』은 그 경계에서 긴장감 넘치는 서사를 전개하며, 독자를 정면으로 기억의 무게 앞에 세웁니다.

 

작품 속 윤이랑은 평범한 학생이지만, 블랙북을 통해 과거의 자신과 마주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동시에 기억이라는 복잡한 층위를 하나씩 해석해 나갑니다. 김하연 작가는 기억을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행동을 결정하는 감정의 핵심’으로 설정합니다. 즉, 이랑은 기억을 통해 현재를 바꾸려는 인물이며, 이는 독자들에게도 “나는 내 과거와 어떻게 싸울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이 작품의 백미는, 기억을 단지 회복의 대상으로만 그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때로는 기억이 너무 아프기에, 잊는 것이 더 나은 경우도 있다는 딜레마. 그러나 김하연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을 회피하지 말고 마주할 것을 조용히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그 기억이 곧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복수는 끝일까, 시작일까

『블랙북』은 단순히 기억을 되찾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기억은 행동을 이끌고, 그 행동은 결국 복수로 이어집니다. 윤이랑은 자신과 주변 친구들이 과거에 겪었던 폭력과 배신, 침묵의 카르텔을 블랙북을 통해 다시 떠올리게 되고, 자신이 당했던 상처를 외면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그 결정은 곧, 복수의 서막입니다.

 

작품에서 복수는 단지 ‘되갚음’의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수는, 정의가 침묵했을 때 마지막으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감정의 분출입니다. 이랑의 복수는 극단적이지 않지만, 날카롭고 집요합니다. 마치 자신을 짓밟은 세계를 다시 구성하려는 듯, 그녀는 블랙북의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려 합니다.

 

김하연 작가는 복수라는 민감한 감정을 미화하지도, 과도하게 죄악시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왜 복수가 필요했는지, 그 감정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깊이 있게 다룹니다. 이랑의 복수는 단지 과거의 원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누군가가 침묵 속에서 고통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즉, 복수는 개인의 것이면서 동시에 공동체를 향한 목소리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서 『블랙북』은 단순한 미스터리 소설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복수와 정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 그리고 침묵하는 다수의 책임을 정면으로 묻는 이야기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특히 십대라는 배경 안에서 벌어지는 복수 서사는 어른들의 세계에서조차 외면당하는 ‘진짜 감정’을 대변해 줍니다.

 

나는 누구인가, 존재의 경계에서

『블랙북』은 궁극적으로 성장소설입니다. 윤이랑은 블랙북을 통해 단지 과거의 상처를 되짚는 것이 아니라, 진짜 ‘나’를 찾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이 여정은 복수나 정의보다도 더 깊고 복합적인 과정입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그리고 앞으로의 나를 연결하는 과정은 이랑이 스스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완성됩니다.

 

작가는 성장이라는 것을 ‘무언가를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무언가를 마주하는 용기’라고 말합니다. 이랑이 성장한다는 것은,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일이며, 아픔을 회피하지 않는 선택이며, 세상에 맞서더라도 자신의 기준을 세우는 것입니다.

 

작품 속 이랑은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 자신이 무력했음을 자책하는 감정, 그 모든 감정을 껴안으며 자신만의 정의를 찾아갑니다. 이 성장 과정은 단순한 변화가 아닌, 존재의 본질을 다시 세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김하연 작가는 십대 독자들이 겪는 감정의 복잡성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고, 그 안에서 성숙이라는 방향을 함께 제시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랑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감정의 결을 안고, 자신의 진짜 이름을 부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나는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잊지 않겠다.” 이 한 문장은 성장의 정의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나만의 블랙북을 꺼낼 시간

『블랙북』은 단순한 청소년 소설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숨겨둔 고통, 분노, 복수를 향한 욕망, 성장의 흔적을 하나하나 꺼내게 만드는 정서적 미스터리입니다. 김하연 작가는 기억과 복수, 성장이라는 다층적인 주제를 감성적으로 풀어내면서도, 현실의 무게를 가볍게 넘기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모든 십대에게, 그리고 한때 십대였던 모든 어른들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자신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말합니다.


“지금, 당신의 블랙북을 펼쳐야 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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