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정원, 한 사람의 여름.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다른 얼굴로 살아가는지를 이야기하는 성장소설
이희영 작가의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는 죽은 형의 흔적을 따라가며 ‘한 사람’이라는 존재를 다양한 시선에서 재구성하는 한 소년의 성장기이자 가슴속에 머무는 슬픔과 그리움을 서정적으로 풀어낸 문학적 성취다. 메타버스와 아바타, 편지와 기억이라는 장치를 통해 소설은 단지 ‘과거를 파헤치는 이야기’를 넘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진심을 어떻게 마주하고 기억하며 결국 그것을 사랑으로 남기는가에 대한 조용한 울림을 전달한다. 귤의 새콤한 맛처럼 읽는 내내 감정을 톡 쏘는 순간이 있다.
이 소설은 단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이야기나 성장통의 상징이 아니다. ‘나’조차 몰랐던 ‘너’의 비밀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 그리고 비밀을 품은 사람을 다시 존중하게 되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기억은 흔들리고 진실은 다층적이며 모든 사랑은 언젠가 이별로 끝나지만 그렇기에 더욱 귀한 순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섬세하게 그려낸 이 작품은 독자에게 기억을 어떻게 안고 살아갈 것인지 묻는 소설이다.
1. “형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된 긴 여정
주인공 선우혁은 죽은 형 ‘선우진’과 쌍둥이처럼 닮은 얼굴을 가졌다. 그 형이 다녔던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죽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기억에 남지 않은 형이라는 존재에 대한 궁금증이 더 크게 자리한다. 혁은 부모에게조차 명확한 기억을 듣지 못한다. 사람마다 형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기억한다.
‘조용하고 성실한 아이’
‘장난기 많고 애교 넘치는 아들’
‘책임감 있는 반장’
그러나 혁은 그런 형을 알지 못했다. 단 한 사람,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형의 정체를 모른다. 가장 가까웠으나 동시에 가장 멀었던 사람. 그 간극이 혁의 마음에 묘한 동요를 일으킨다.
이 질문은 단지 형을 향한 궁금증이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기 인식의 시작이며 ‘기억이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에 대한 인식의 첫걸음이다.
2. ‘가우디’라는 감정의 평행세계 – 가상과 현실을 잇는 메타포
혁이 발견한 형의 비밀은 메타버스 속에서 시작된다.
과거 한때 유행했다는 가상 현실 게임 ‘가우디’. 형의 계정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곳에서 여전히 ‘정원’을 돌보며 존재하고 있는 아바타 ‘곰솔’. 혁은 자신이 형을 사칭하며 그 정원에 들어갔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동시에 곰솔이라는 존재에게 점점 더 끌린다.
메타버스 공간이라는 설정은 이 소설의 진짜 매력을 극대화한다. 단순한 SF 장치가 아니라 과거를 보관하는 감정의 저장소 또는 슬픔을 직면하지 못한 사람들이 피신하는 정서적 피난처처럼 기능한다.
여기서 곰솔은 매우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오랫동안 형의 세계를 떠나지 못했고 형의 아바타가 다시 등장하자 마치 ‘형이 살아돌아왔다’는 듯 반응한다. 이는 메타버스가 갖는 양면성, 즉 "기억을 영원히 보존하는 공간이자 동시에 ‘죽음을 부정하게 만드는 공간’"이라는 모순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혁은 이 세계를 통해 형의 감정에 다가서게 된다. 그리고 곰솔이 쓰는 편지를 통해 형이 가졌던 사랑과 고통과 함께 말하지 못한 진심들을 읽게 된다.
3. 편지로 전해지는 마음 – 말하지 못했던 그 한마디
소설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화자의 ‘편지’가 교차되며 삽입된다.
이 편지들은 한편으론 형의 연인일 수도 있고 가까운 친구일 수도 있으며 또 다른 정체성을 지닌 비밀스러운 존재일 수도 있다.
편지의 문장은 단순하면서도 깊다.
그것은 첫사랑의 설렘을 품기도 하고 말하지 못했던 고백을 담기도 했으며 죽은 사람에게 남긴 애도의 메시지처럼 읽히기도 한다.
중요한 건 편지의 주체가 누구인지가 아니라 그 마음이 누구를 향해 있었는지이다. 이 희미한 경계 속에서 작가는 굳이 진실을 모두 밝히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독자의 감정이입을 유도한다.
편지를 읽으며 혁은 형의 또 다른 얼굴을 알게 된다. 단지 죽은 형이 아닌 사랑을 했던 사람, 누군가의 마음에 남은 사람, 그리고 비밀을 간직했던 사람으로서의 ‘형’을. 이 순간 혁은 형을 더는 이상화하거나 단순화하지 않고 하나의 복잡한 인간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4. 귤의 맛처럼 새콤하고 씁쓸한 감정들 – 사랑, 성장, 이별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라는 제목은 소설 전체의 정서를 함축하는 강력한 상징이다. 여름의 귤은 아직 완전히 익지 않아 달기보다는 시큼하다. 서툴고 빠르게 도착한 감정이나 준비되지 않은 이별처럼 말이다.
작중 곰솔과 형, 그리고 곰솔과 혁 사이에는 이처럼 완성되지 않은 감정이 흐른다. 그것은 서로가 ‘다 말하지 못했기에 남겨진 미완의 감정’이라 말할 수 있고 상처지만 동시에 기억이 되는 감정이다.
귤이라는 소재는 그래서 '조기성숙'의 은유다.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야 했던 혁, 너무 일찍 사랑과 이별을 경험했던 형, 너무 오래 기다려야 했던 곰솔. 그들 모두는 결국 여름에 귤을 먹은 사람들이다.
5. 결국 성장이라는 이름의 이별
소설의 말미에서 혁은 더 이상 형의 아바타로 가우디에 접속하지 않는다. 곰솔에게도, 자신에게도 진실을 말하고, 이제 더는 과거 속에 머무르지 않기로 한다. 그것은 단순한 ‘성장’이 아니라 기억과 이별하는 방식에 대한 주체적 선택이다.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는 감정은 평생 이어질 수 있지만 삶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 소설은 조용하게 보여준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라는 질문으로 끝맺는 순간 독자는
이 소설이 단순한 상실 서사가 아니라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깊은 탐색임을 실감하게 된다.
우리 모두의 정원은 아직 자라고 있다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는 무수한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누군가를 얼마나 제대로 알고 기억하는가?
사람은 하나의 얼굴만을 지닐 수 있는가?
말해지지 않은 마음은, 결국 어디로 가는가?
이 소설은 그 질문들에 정답을 주지 않지만 독자가 그 답을 스스로 찾아가도록 유도한다. 기억은 한 사람을 완전히 보여줄 수 없다. 그러나 기억 속에 남은 정원, 나만이 알고 있는 향기, 말하지 못했던 고백들은 분명 존재하고 그것은 소중하다.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는 떠난 사람을 위한 소설이 아니다. 남겨진 사람을 위한 이야기다.
살아남은 우리는 매일 조금씩 여름의 귤을 맛보며 또다시 새로운 하루를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