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보다 중요한 건 진심을 지키는 용기
현실을 직시하는 판타지,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
범유진 작가의 소설 『리와인드 베이커리』는 판타지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안에는 청소년의 성장, 학교폭력, 거짓 소문, 집단의 침묵, 그리고 '진실을 믿는 용기'라는 묵직한 현실이 담겨 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이라는 상상은 누구에게나 매혹적이지만 이 책은 그 질문을 단지 판타지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을 돌려도 변화하지 않는 세상의 구조 그리고 변화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선택과 책임에 대해 정면으로 다룬다.
그 중심에는 짝사랑하던 소년이 ‘몰카범’이라는 소문에 휘말리는 충격적인 상황을 마주한 소녀 ‘한별’이 있다. 소설은 단순히 ‘억울함을 밝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간이 멈춰 있던 공동체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내는 한 소녀의 눈물과 결단, 그리고 연대를 통해 거짓보다 진실이 강해질 수 있는 순간을 깊게 조명한다.
1. 거짓이 진실보다 빠른 세상
이야기의 시작은 한별의 시선에서 진행된다. 고백도 못한 첫사랑 ‘서성건’이 전학을 간 직후 그는 학교 내 탈의실에 몰카를 설치했다는 믿기 힘든 소문의 중심이 된다. 그 소문은 너무 빠르게 너무 구체적으로 퍼진다. 누구도 직접 본 적 없지만 모두가 진실처럼 믿고 말한다.
이 상황은 독자로 하여금 매우 불편하고 현실적인 불안을 자극한다. 소문은 본질보다 자극에 반응하는 인간의 속성과 집단 속에서의 동조 심리를 드러내며 현대 사회의 정보 왜곡과 혐오의 확산 구조를 날카롭게 비춘다. 특히 학교라는 폐쇄적 공간에서 발생하는 이 소문의 파급력은 오늘날 SNS,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더욱 공고해진 ‘비공식적 처벌’ 구조와도 겹쳐진다.
한별은 성건이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는 본능적 믿음을 갖고 있지만 그 믿음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동조자’, ‘2차 가해자’로 몰릴 수 있다는 두려움도 함께 안고 있다. 이 갈등은 단순한 정서적 혼란이 아니라 청소년이 마주하는 구조적 침묵의 강요다.
2. ‘리와인드 베이커리’의 판타지, 그러나 현실의 선택
한별이 우연히 발을 들이게 되는 ‘리와인드 베이커리’는 이름처럼 시간을 되감을 수 있는 신비한 공간이다. 이곳에서 한별은 ‘한 달 쿠키’를 통해 서성건에게 소문이 뒤집힌 바로 그 날. 한 달 전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 소설이 흥미로운 지점은 시간을 되돌려도 현실은 결코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그린다는 점이다. 한별은 사건의 진상을 직접 목격하지만 진실은 입증되지 않는다. 아이들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진실은 여전히 ‘확신 없는 말’로 전락할 뿐이다.
시간 쿠키는 판타지의 장치이지만 작가는 이를 해결의 열쇠로 삼지 않는다. 해결은 결국 사람이 한다. 행동이 한다. 시간을 돌렸다는 건 단지 기회를 얻은 것이지 기적을 부여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 한별이라는 인물의 입체성과 성장
한별은 단순히 ‘정의로운 아이’가 아니다. 그녀는 처음엔 망설이고 주저하고 심지어 회피한다. 그러나 중요한 순간마다 그녀는 ‘보고 싶은 것’이 아닌 ‘본 것’을 선택한다. “난 내가 본 것만 믿어.”라는 그녀의 말은 이 소설의 모든 주제를 관통하는 핵심이자 독자에게 가장 강하게 와닿는 대사다.
한별은 리와인드 베이커리의 기회를 반복해서 사용한다. 하루 쿠키, 한 시간 쿠키, 심지어 다시 돌아가길 망설이면서도 용기를 낸다. 그녀의 행동은 시간보다 진심이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변화는 단 한번의 기회가 아닌 반복된 선택과 끈질긴 연대에서 탄생한다는 점에서 그녀는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이다.
4. 연대의 의미 – 성건, 유나, 수정
서성건은 피해자이자 한별의 첫사랑이다. 그는 명확히 자신을 변호하지 못하고 침묵하지만 누구보다 약하고도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그의 존재는 ‘억울함을 스스로 해명할 수 없는 사람’의 상징이다.
나유나는 위기 속에서 입을 닫지만 나중에는 다시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내고 수정은 과거 연예인 데뷔를 앞두고 루머로 모든 것을 잃은 경험이 있다. 이 세 인물은 모두 소문이라는 이름의 ‘정신적 폭력’에 의해 무너졌던 인물들이며 한별은 그들의 손을 ‘다시’ 잡는다.
이 연대는 단순한 우정이 아니다. 무너졌던 공동체의 재건이며 ‘진실’이라는 작은 씨앗이 ‘용기’라는 물을 먹고 다시 피어나는 과정이다. 그것이 이 소설이 가장 감동적인 이유다.
5. 결말과 에필로그 – 진심은 시간을 뚫고 닿는다
『리와인드 베이커리』의 결말은 극적인 반전보다는 서서히 무너졌던 시스템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에 가깝다. 한별의 연대와 진심은 결국 주변 사람들을 움직이고 그들이 침묵을 깨게 만든다. 최초의 소문이 만들어낸 가해자는 드러나고 무너졌던 믿음은 다시 회복된다.
이 결말이 특별한 이유는 단지 문제를 해결했다는 데 있지 않다. 진실을 믿는 소수의 사람들이 보여준 감정, 인내, 행동이 결국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에 담긴 리와인드 베이커리의 마지막 메시지는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지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당신이라면 다시 돌아갈 용기가 있는가
『리와인드 베이커리』는 단지 청소년을 위한 판타지가 아니다. 이 이야기는 학교폭력, 루머, 군중 심리, 2차 가해, 그리고 그 모든 구조 속에서 ‘진실은 왜 이렇게 힘이 없을까’를 묻는다.
그러나 이 책은 절망에 머물지 않는다. 작지만 단단한 용기 하나 그리고 그 용기에 응답한 몇 명의 손만 있어도 세상은 바뀔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어도 믿음은 되살릴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루머는 누군가를 무너뜨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루머를 믿지 않고 옆에 서 줄 한 사람만으로도 누군가는 살아갈 이유를 얻게 된다.
『리와인드 베이커리』는 바로 그 ‘한 사람’이 되어주는 이야기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