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만든 바이러스, 인간을 광인으로 만든 건 과연 병이었을까?”
『메이즈 러너』 프리퀄, 그 치명적인 시작을 마주하다.
1. 디스토피아가 시작된 그날, 광기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킬 오더』는 제임스 대시너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메이즈 러너》 시리즈의 전사(前史)를 다루는 작품이다.
《메이즈 러너》가 이미 무너진 세계 속 '미로 실험'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쳤다면 『킬 오더』는 그 세계가 어떻게 무너졌는지, 광기를 유발하는 바이러스가 왜 퍼지게 되었는지, 인류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선택을 했는지를 밝히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 무대는 지구의 대재앙 직후다.
지구 대기를 뒤덮은 태양 플레어(Solar Flare) 현상으로 수백만 명이 사망하고 극단적인 기후변화로 도시 기반과 문명 전체가 무너진 후, 이제 남은 사람들은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전쟁을 치른다. 그 사이 위키드(W.I.C.K.E.D.)라는 집단은 '인류를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도덕과 윤리의 한계를 뛰어넘은 생체 실험과 바이러스 배포 실험을 감행한다.
이제 『킬 오더』는 묻는다.
"세상을 구하기 위한 폭력은 정당한가?"
"정말 인간을 미치게 만든 것은 바이러스인가, 아니면 인간 자체인가?"
2. 마크와 트리나 – 인간성의 최후 보루를 지키려는 소년들
이야기의 주인공 마크는 지하철에서 태양 플레어의 재앙을 겪고 살아남은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함께 탈출한 트리나는 그의 오랜 소꿉친구이자 이야기 속에서 유일하게 그가 지켜야 할 이유이자 살아야 할 명분으로 남는다. 대부분의 서바이벌물에서 그렇듯 이들은 처음에는 단지 ‘살아남기 위한 동물적 본능’에 충실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마크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붕괴, 광인의 출현, 정신이 피폐해지는 상황을 경험하며 점점 선택의 기로에 내몰린다. 그는 중반부 이후 바이러스에 감염되며 점점 이성을 잃고 본인의 감정조차 믿을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폭력적인 광증 속에서도 트리나를 지키기 위한 ‘선택’을 멈추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 『킬 오더』는 단순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이 아니다. 이야기는 생존 그 자체보다도 극한의 조건 속에서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 그리고 자신이 괴물이 되어버리는 순간에도 타인을 위해 남은 힘을 쏟는 선택의 윤리를 정면으로 다룬다. 마크는 점점 무너지는 자신의 정신 속에서 마지막까지 인간으로 남고자 한다.
이것이야말로 『킬 오더』가 보여주는 진짜 ‘영웅서사’의 본질이다.
3. 광기를 설계한 자들 – 위키드의 태동
《메이즈 러너》 세계관을 관통하는 절대악 혹은 회색지대 조직, 위키드(WICKED). 그들은 ‘인류의 구원’을 명분으로 윤리적 금기를 파괴한 인공지능적 조직이며 과학기술, 정보 분석, 생물병기 운용까지 모든 영역을 통제하는 미래형 권력체다. 『킬 오더』에서는 그 위키드의 초기 계획이 밝혀진다. 이들은 바이러스에 면역인 아이들을 찾기 위한 실험을 수행하며 먼저 정착촌에 '선별된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방식으로 인류를 실험하기 시작한다.
과학이 윤리보다 우선될 때 그리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믿는 순간, 이 조직은 ‘사악’이라는 이름처럼 사람의 생명을 변수로 간주하고 희생시킨다. 『킬 오더』는 단순한 반과학주의적 주장이 아니다. 이 작품은 과학과 권력이 손을 잡았을 때 인간이 얼마만큼 냉혹해질 수 있는지를 냉정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독자들에게 묻는다.
“정말 과학은 모두를 위한 것이었는가?”
“선택받지 못한 사람은 실험체가 되어도 괜찮은가?”
4. 폭력과 광기의 감염 – 바이러스는 인간을 비추는 거울
『킬 오더』의 바이러스는 육체를 망가뜨리는 병이 아니라 이성을 먼저 붕괴시키는 병이다. 감염자들은 점점 자신의 감정과 판단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폭력적이며 정신착란 상태로 타인을 공격하거나 자해하며 죽음을 맞는다. 이 설정은 단지 '재밌는 설정'이 아니다. 바이러스는 인간 내면의 폭력성, 불안, 광기, 잔혹함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다. 그리고 이 설정은 자연스럽게 현실의 전염병 공포, 사회적 혼란, 혐오와 차별 문제와도 맞닿는다. 코로나19, 마르부르크, 사스 같은 실제 사례에서도 보듯 감염 그 자체보다 사람들의 공포와 분열이 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
『킬 오더』는 이러한 공포의 확산과 인간 본성의 붕괴를 바이러스에 담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결국 이 소설에서 진짜 무서운 것은 병이 아니라 그 병에 감염되었을 때 인간이 어떻게 변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감염을 두려워하는가, 아니면 감염된 후의 우리 자신을 두려워하는가?”
5. 폭발적 전개, 한시도 쉴 수 없는 서스펜스
제임스 대시너는 액션과 전개 속도, 그리고 정보 배치의 타이밍을 조절하는 데 있어 탁월한 작가다. 『킬 오더』는 초반의 재난 묘사부터 중반부의 추적전, 후반부 비행선 침투와 기지 내부 폭로 장면까지 쉼 없는 전개와 클라이맥스의 연속을 보여준다. 특히 기지 내부에서 밝혀지는 위키드의 연구 보고서, 실험 문서, 감시 시스템의 묘사는 한 편의 스릴러 영화처럼 조여오는 긴장감과 공포를 선사한다.
『킬 오더』가 그리는 세계는 생존 서사이면서 동시에 과학 스릴러이고 정치적 음모가 숨어 있는 사회적 우화이며 인간 심리를 조망하는 심리 드라마다. 이처럼 복합 장르를 매끄럽게 융합한 구조는 『킬 오더』가 단지 YA(영어덜트) 대상 소설을 넘어 성인 독자도 몰입할 수 있는 세계관과 문제의식을 품고 있다는 증거다.
6.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들의 이야기 – 그리고 다가올 절망
결말에서 마크와 트리나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 그래도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폭탄을 들고 위키드의 기지를 향해 돌진한다. 이 결말은 비극이자 영웅서사이며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시작점이다. 이들의 희생은 명확한 승리로 귀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소설이 보여주고자 한 메시지는 분명하다.
“살아남은 자들이 아니라, 끝까지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은 자들이 진짜 주인공이다.”
그리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는 마침내 토머스와 테리사가 등장하며 이 모든 재앙의 후속 실험으로 이어질 ‘미로 프로젝트’의 탄생 배경이 암시된다. 『킬 오더』는 이야기 자체로 완결성을 가지면서도 《메이즈 러너》 시리즈를 되짚고 재조명하게 만드는 중요한 위치에 자리한다.
이 책을 읽지 않고 본편을 본 독자라면 이 리뷰를 본 순간 지금 당장 펼쳐보고 싶어질 것이다.
『킬 오더』는 질문하는 소설이다
『킬 오더』는 묻는다.
- "생존을 위해 어디까지 비윤리적인 선택이 가능할까?"
- "치료를 위해 몇 명의 희생은 감수할 수 있는가?"
- "기억을 잃는 것이 해방일까, 통제일까?"
- "선택받은 자의 생존은 다른 이의 죽음 위에 존재해도 되는가?"
이 작품은 《메이즈 러너》 시리즈의 과거를 설명하는 동시에 오늘을 사는 우리가 반드시 마주해야 할 윤리, 과학, 정치, 공동체에 대한 질문들을 우리 앞에 내민다.
이 소설은 판타지가 아니다.
곧 다가올 수도 있는 미래의 현실, 그 진실의 리허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