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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밤이 영원할 것처럼 – 서유미 장편소설 리뷰

by 일상 좋아 2025.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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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영원할 것처럼』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 속 고요한 균열을 따라가는 소설입니다. 현실의 언어로 쓰였지만, 정서적으로는 매우 은유적인 이 작품은 살아 있으되 완전히 살아 있지 못한 사람들, 말을 하고 있지만 결국 침묵에 가까운 대화들,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고 싶은데 가까워질 수 없는 감정의 거리를 세밀하게 그려냅니다.


이 소설은 우리 모두의 밤, 그 길고 어두운 시간의 정서적 풍경화입니다.

 

어두운 밤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인물의 정서 지도

주인공 지안은 보험회사에서 일하는 평범한 30대 여성입니다. 세상과의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인정받고 싶고, 이해받고 싶어 하는 모순된 감정의 지점에서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책임감이 강하고 가족에게 헌신적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를 돌보는 방법을 잊은 채 무감각한 삶 속에 자신을 파묻고 있었습니다.

 

지안의 일상은 반복적이고 단조롭지만, 소설은 바로 그 반복 속에서 미묘하게 변해가는 감정의 떨림을 포착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한 채, 작은 불편함과 피로를 묵묵히 견딥니다. 하지만 어느 날, 지안은 문득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사라져도 누군가 알아챌까?”

 

이 문장은 이 소설의 정서적 진앙지이자, 현대인의 고립감을 가장 정확히 표현한 대사 중 하나입니다. 지안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관계 속에서 점점 존재감이 엷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존재감의 희미함은 곧 자신의 삶이 ‘의미’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를 반증하는 신호가 됩니다.

 

관계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의 연속이다

이 소설은 지안을 둘러싼 인물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정서적 복잡성과 인간 내면의 거리감을 그려냅니다. 지안이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 결핍되어 있고, 그 결핍은 조용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전염됩니다. 예를 들어, 회사 후배는 상냥하지만 끝없이 피로해 보이고, 고객 중 한 남성은 무례하면서도 자신에게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지닌 듯합니다. 지안의 여동생은 겉으로는 당차고 강하지만, 내면에는 지안조차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물들과의 관계는 극적인 사건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대신 서유미 작가는 매우 느리고 낮은 리듬으로 관계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감정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설명되지 않고, 이름 붙여지지 않으며, 그렇기에 더 깊게 스며들어 독자의 마음을 흔듭니다.

 

중요한 점은, 지안이 이 관계들을 통해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누군가를 만나서 삶이 바뀌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과의 반복적인 접촉을 통해 지안은 결국 자신의 감정과 직면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불안은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일상적이다

『밤이 영원할 것처럼』은 현대인이 겪는 불안을 드라마틱하게 그리지 않습니다. 이 소설의 불안은 직장에서의 피로, 가족 안의 미묘한 거리, 인간관계 속 피상적인 말들에서 옵니다. 작가는 그 일상적인 불안을 끈질기게 붙들고, 그 불안이 ‘사라지지 않는 상태’임을 조용히 인정합니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는 지안이 자신도 모르게 반복하던 루틴에서 벗어나는 장면입니다. 그것은 아주 작은 일탈이며, 어쩌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 순간 지안은 처음으로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걸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 질문은 이 소설이 궁극적으로 독자에게도 던지고 있는 물음입니다.

 

우리 모두는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점점 자기 자신을 놓치고, 자신의 감정조차 들여다보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리고 문득 그런 감정들이 밤처럼 길게 이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문체와 리듬 – 조용하지만 끝내 흔들리는 문장들

서유미 작가의 문체는 극도로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감정의 결을 깊게 따라가는 방식으로 독자를 몰입하게 만듭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일상적인 어휘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속에는 지속적으로 누적되는 감정의 층위가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지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단순한 문장 안에도 지안의 불편함, 무기력, 체념, 그리고 작지만 분명한 의지 같은 것들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서사의 밀도는 소설 전체에 일관되게 유지되며, 독자 스스로 감정을 해석하고 느끼게 만듭니다. 또한 서유미 작가는 서사적 클라이맥스를 만들지 않습니다. 갈등은 폭발하지 않고, 감정은 침잠합니다. 이러한 서사 전략은 『밤이 영원할 것처럼』을 사건 중심이 아니라 정서 중심으로 읽히게 만드는 결정적인 힘이 됩니다.

 

 밤은 반드시 끝나지만, 그 시간은 소중하다

『밤이 영원할 것처럼』은 사실 우리가 모두 한 번쯤 살아본 시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밤은 누군가에겐 외로움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무력감이며, 누군가에겐 다시 시작하기 전의 조용한 침묵일 수도 있습니다. 서유미 작가는 그 밤을 특별한 의미로 치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긴 시간 동안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어떻게 버텼는지를 조용히 기록합니다. 그리고 소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당신이 혼자였던 그 시간,
누군가는 비슷한 밤을 건너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줘요.”

 

『밤이 영원할 것처럼』은 불안하고 지친 마음에게 건네는 작고 단단한 위로입니다.

 

조용히, 그러나 깊이 오래 남을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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